마인드변화 스토리 : 부자가 될 수 없는 마인드 내가 자라온 환경
#1
단군이래 가장 돈 벌기 쉬운 때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오는 요즘.
나에게도 근 몇 년간 많은 변화가 생겼다.
나는 결혼 3년차 아이가 없는 신혼부부이며 평범한 직장인으로 생활하다가
최근에는 *디지털노마드의 삶을 지향하며
경제적독립을 이루어가는 동시에,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 디지털노마드: 인터넷과 업무에 필요한 각종 기기, 작업 공간만 있으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유목민
2017년 결혼 후 2018년 여름 첫 집을 구하면서 내 삶은
‘첫 집을 구하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할 만큼 큰 변화가 있었다.
눈에 보이는 외적인 변화는 물론이고 마인드에 큰 변화가 있었고
그 경험을 나누고 나 스스로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글을 남겨본다.
내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돈에 대한 마인드’이다.
생각보다 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내 마인드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위해 어린시절의 삶은
필연적으로 다룰 수 밖게 없겠다.
나는 어릴 때부터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노동자의 자식이야’,
‘난 돈이 넉넉하지 못하니 부모님 걱정시켜드리지 않도록 스스로 할 수 있는걸 열심히 해야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자랐다. 초, 중학교 때까지 약 2~3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녔고 -전세를 살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학업에 지장이 없을만큼 근거리로 이사를 했기 때문에 초, 중학교 때 이사로 인한 학업 지장은 없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입학할 때 즈음 우리 부모님은 자가를 마련하셔서 꽤 교육열이 높았던 신도시로 이사를 갈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살게 된 ‘우리 집’이었고, ‘아파트’였으며 ‘내 방’을 갖게 된 첫 집이었다.
(성인이 되고난 후 알게된 사실은 아버지께서 내가 공부를 꽤 열심히 하니 교육열이 높은 신도시를
택해서 아파트 분양을 받으셨다고 한다)
다시 어린시절로 돌아가서, 나는 안 살아본 주거형태가 없이 거의 모든 주거형태를 다 겪어왔다.
아주 어릴 때는 단칸지하방에서 유아기 시절을 보냈고 그 후에는 농가주택에서 짧게 살았으며 -부모님께서
비닐하우스 자영업을 잠시 하셨다가 접으심 - 그 후에는 다시 살던 지역으로 돌아와 3층짜리 빌라의 1층, 그리고 또다른 빌라의 1층, 그리고 또 다른 빌라의 반지하를 거쳐 아파트로 이사를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 독립을 하면서 고시원에서 8개월, 오피스텔에서 1년, 또 그 후 신혼집을 오피스텔 2군데를 옮긴 뒤 자가를 마련하여
서울의 신축빌라에서 거주하고 있다.
부동산은 오피스텔 2채와 빌라 2채를 자가로 소유하고 있으며 월세수입, 전세를 놓고 있다.
앞으로 부를 축적하기 위한 단계는 스텝바이스텝 밟아나갈테지만
지금의 내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마인드가 변화하고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 남기고자 한다.
앞으로 각 주거형태별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썰을 풀어도 재미있겠다..
(지금은 재미있지만 그 때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어린시절의 나 칭찬해...)
#2
우리 부모님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신혼살림을 시작하셨다.
재산을 물려줄 부모가 있지도 않았고 수입이 높은 전문직종도 아니었다.
우리 부모님은 철저하게 ‘노동자’계급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 직업은
일반 직장을 다니신다기보다 몸을 쓰는 직업이라는 것이 기억난다.
초등학교 때 내 기억의 조각에는 아버지가 운전하시던 트럭을 타고 가끔 학교에 갔던 기억이 있다.
어렴풋이 기억하기로는 어린 마음에 ‘부끄러워 하는건 아빠한테 미안한 일이니까 최대한 부끄러워하지 않을테야’하는 마음으로 학교 앞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내리곤 했었던 기억이다.
아주 어릴 때라도 난 나름대로 철 든 딸이었고 아빠를 민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랑스럽진 않았지만 부끄럽고 싶지도 않았다. 부끄럽지 않았다는게 아니라 부끄럽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여하튼 부모님께서는 넉넉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내가 자라면서 내 앞에서
돈걱정을 하지는 않으셨고 -두 분은 정말이지 ‘성실’하신 분들이셨기에-
노동을 쉬지 않으셨고 근검절약하셨으며 책임감이 강한 분들이셨다.
그래서 정말 두 분히 결혼하신 후 약 20년 뒤에 자가를 마련할 수 있었지 않았나 싶다.
나는 공부를 곧잘 하는 학생이었다. 어린시절 반장, 부반장을 도맡아 했으며
중학교 때는 전교에서 손 꼽힐 정도의 성적을 받기도 했다.
없는 형편이었지만 내가 부족하다고 느꼈던 과목은 단과 학원을 다니기도 했다.
(다행히 오빠가 공부에 큰 관심이 없던터라 교육비를 나에게 몰빵해주실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은 후회되는 일이지만 어린 시절에 나는 예체능에도 재능이 있어서
개인레슨도 받고 예술학교 입시를 준비하기도 했다.
(근데 준비랄 것도 없이 정말 짧은 기간 돈만 쓴 시간이 됐다)
내 개인레슨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는 평소에 일하시던 양보다
더 많은 일을 무리해서 하셨고 -그 이유가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우리가 자가를 마련하고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즈음 아버지는 신장에 이상이 생기셨고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발병으로 꽤나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난 진로를 바꾸게 되었고..
부모님은 내가 알아서 잘 하는 딸, 공부를 열심히 하는 딸로 믿어 주셨고 지지해주셨다.
두 분이 하실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의 것들을 제공해주셨다. 내가 자라는 과정에서
아버지는 자못 내가 공부에 관심을 갖고 열심히 해주는 것에 대해서 뿌뜻하셨던 것 같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초, 중학교 때까지 두각을 나타내던 성적은 교육열이 심했던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평범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지만. 그저 그런 지역에서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잘 하는 학생처럼
보였지만 선행학습도 부족하고 공부에 대한 기본기가 약했던 것 같다.
난 당연히 대학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학을 가지 않는 삶은 낙오자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내가 원하는 대학 발 밑에도 못 미칠 성적을 받으면서 고민이 많았고 힘들었던 것 같다.
우선 초, 중학교 때까지 친했던 친구들과 떨어져서 낯선 환경으로 오면서 적응해야 했고
위에서부터 계속 말하고 있지만 교육열이 뛰어난 지역의 학교에서 난다 긴다 하는 학생들은
이미 선행학습을 끝내고 모의고사를 준비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대학을 가야 하니 나도 내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를 했다. 하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고등학교 입학 하자마자 아버지의 신장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았고 곧바로 투석에 들었다.
아버지가 신장투석을 시작하자 어머니도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오빠는 1시간 거리에 있던
고등학교 마지막 1년을 힘겹게 다니고 있었고 나도 나대로 정신이 없었다.
새 집, 그리고 자가를 마련해서 이사갔다는 기쁨도 잠시, 우리 가족에게 매우 힘든 시기가 다가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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